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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위로받고 싶어 한다
- 등록일시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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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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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위로받고 싶어 한다
2000년에 발생한 비극적인 존속살해 사건부터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속 제제의 이야기까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진심 어린 ‘이해’와 ‘위로’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이 어떻게 신의 영역에 닿는 고결한 행위가 되는지 성찰해본다.
이해받지 못한 고독의 끝, 2000년의 비극
2000년에 엽기적인 존속살해 사건이 있었다.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이 어느 날 자기 부모를 살해하고는 그 시신을 토막 내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군데군데에 버렸다. 더 충격적인 건 무언지 모를 공허함에 망연자실해하는 동생을 대신하여 기자들이 던진 질문에 대답했던 형의 한마디였다.
“나는 동생을 이해한다.”
형은 이 한마디와 더불어 안타까운 눈으로 동생을 지켜보았다. 장교 출신인 아버지와 명문 여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어머니의 둘째 아들. 문화 수준이나 경제 상황 모두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었으나 부모의 욕망과 성격이 매우 달라 결혼 초기부터 부부관계가 매우 냉담했다. 부모는 부부 싸움을 하면 두세 달은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각방을 쓸 정도여서 집 안에는 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부모의 그런 스트레스가 모두 자식들에게 향했다. 부모는 각자 생활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거침없이 쏟았는데 반항하고 대드는 형에게보다는 동생인 이 군에게 더욱 영향이 컸다. 형은 자신을 대하는 부모의 성숙하지 못한 태도와 오류들을 때론 거부하고 때론 맞받아치면서 자신을 세워갔던 것 같다.
넘을 수 없었던 부모라는 이름의 벽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받은 탓에 이 군은 만성 우울증, 대인기피증, 피해망상증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보다 어머니를 더 무서워하여 벌벌 떨었던 이 군은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갖지 못했다. 무한정 받아줄 것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 군은 성인이 되었을 때 돈으로 여자를 사야 하는 줄 알았다. 정말 마음에 두고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여성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던 이 군은 사창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꼭 안아달라고, 입맞춤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거리의 여자에게 웃돈을 얹어줘가며 따뜻한 스킨십을 부탁할 정도로 간절하게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다.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딱 한 번, 어머니 앞에서 울면서 자신이 그동안 받은 고통을 하소연했다. 그때 어머니의 반응은 “왜 그때 그때 말하지 않고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느냐, 사내새끼가 한심하다”는 독설뿐이었다. 이 군이 부모를 살해한 것이 그 며칠 후였다. 시신을 처리하고 3일 후에 검거된 이 군은 경찰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미안하다’ 한마디만 해줬어도 다 잊고 살았을 거예요. 그 말이 그렇게 어려운 말인가요?”
이 군은 누구보다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있었다. 다름 아닌 부모의 벽! 부모의 벽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보통은 그 벽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넘는다. 반항도 하고, 화해도 하고, 공격적이 되었다가, 협상도 하고, 적당한 타협점에서 위로도 하고, 그러면서 서서히 벽을 넘어 분리되어간다. 그러나 이 군은 그 견고한 벽을 넘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이것이 살해의 이유다. 넘을 수 없는 견고하고 무서운 벽이므로, 결국은 망치로 벽을 무너뜨리기로 한 것이다.
사랑을 갈구했던 소년, 제제와 뽀르뚜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 나오는 상처 많은 꼬마 제제를 생각해본다. 아빠는 일자리를 잃었고, 여섯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했던 엄마는 여전히 파김치가 되도록 공장에서 일을 한다. 누나들도 온종일 공장이나 집에서 일을 한다. 이 가난하고 누추한 가정에서 감수성 풍부한 제제는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면서 하루가 멀다고 매를 맞는다.
그런 제제가 뽀르뚜가 아저씨에게 마음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아를 회복하고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주목하기 바란다. 뽀르뚜가가 제제에게 주었던 것은 단지 든든히 기댈 수 있는 어깨만이 아니다. 그 아이 자체로 보아주는, 그 아이가 그토록 기다렸던 따뜻하고 순한 눈길이었다. 제제에게 그것은 얼마나 축복 같은 선물인가. 그 눈길이 아이 안에 기죽어 있던 천진성을 환히 피어나게 하고, 아이가 본래 지니고 있던 아름다운 성품을 펼칠 길을 열어주었다. 제제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준 뽀르뚜가처럼 ‘그런 사람’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하면 유행가에 녹아 있는 노랫말에 우리는 공감하는가.
타인의 아픔에 건네는 신의 손길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준 단 하나의 사람입니다”나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 너란 걸 알아”라는 가사에 우리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던가. 그렇다면 시각을 달리해서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보자. 내가 간절히 바라던 ‘그런 사람’이 멀리 있지 않다고 하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보자.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나와 똑같은 것에 아파하고 똑같은 것을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 사람의 어색한 몸짓 하나에서도 그가 지닌 가장 빛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되면 교양에서 나온 배려심이 아니라 내 마음이 가는 그대로를 따라 그사람의 손을 잡아주게 된다.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힘들었니.
그렇게 말하며 손을 잡아주는 마음이란 얼마나 고결한가. 이 사람은 누구나 신의 손길을 기다리지만 이런 것이 곧 신의 손길 아닐까. 사람은 자신에게는 신이 될 수 없지만,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신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때, 신도 자기가 인간을 창조한 게 잘못은 아니었다고 위로받는다.
글 김영아 그림책심리성장연구소 소장
발췌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지 26년 3월호